<산수: 억압된 자연>
윤재갑, 상하이 하우아트 미술관장
인간이 눈으로 지각하는 3차원 대상을 2차원 평면에 재현하는 방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각예술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자 관심사였다. ‘한정된 평면에 멀고 가까운 느낌, 공간의 깊이감이나 부피감, 또는 물건의 크기를 모두 표현하려는’ 인류의 공통된 염원은 동서양에서 상이한 경로를 통해 진화해왔으며 다양한 방면에서 인류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처음에 거리와 물체를 측량하던 원근법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변의 모든 것, 나아가 추상적인 대상까지도 객체로 만들고 관찰하게 된다.’ 원근법은 점차 정보통신기술이나 컴퓨터와 결합하여 판옵티콘이나 CCTV 등 광범위한 신체 ‘감시 미디어’로 변해갔다. 푸코는 이러한 시각체계가 ‘감시와 처벌’을 통해 이미 새로운 권력행사의 핵심적인 도구가 되었음을 밝혔다. 나와 대상을 분리하고 인식하던 소박한 객관주의는 점차 인간-자연-신으로 구성된 세계전체를 인식/통제하는 기본 틀로 변모되어 갔고, 빅데이터와 정보통신을 장악한 권력과 자본의 핵심구성요소가 되었다.
15세기 이탈리아인들이 발명한 서양의 원근법은 하나의 고정된 시점과 움직이지 않는 대상들을 전제로 성립한다. 하지만 내 눈과 대상이 모두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원근법은 ‘시각을 유기적인 삶에서 분리시킨 체, 세계를 세계 바깥에서 바라보는 태도’이며, 사진술처럼 작은 구멍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간이 정지된 광학적 공간’이었다. 르네상스 이후 500년간이나 지속된 서양의 원근법은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원근법에 입체감을 부여한’ ‘실시간 원근법’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 변화는 산업혁명과 증기기관의 발명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지평선을 달리는 기차에서 바라본 풍경은 언제나 연속적이고 유동적이며 파편적이지만, 고전적 원근법으로는 이에 대한 재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제 피카소를 비롯한 입체파 화가들은 실시간 원근법을 이용해 본격적으로 대상을 분석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철도원근법(실시간 원근법)’과 입체파는 과학적 충격이 인간의 시각체계에 변화를 가져온 첫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기술/예술의 동조화는 이후 더욱 거세졌다. 라이트 형제의 항공학과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충격을 받은 폴록은 바닥에 화폭을 내려놓고 공중에서 폭탄을 투하하듯 물감을 뿌려 댔다. 지상에서 지평선을 따라 전개되던 철도원근법이 이제 공중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항공원근법’으로 바뀐 것이다.
르네상스 시기부터 현대까지 근 500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화해온 서양의 원근법들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놀랍게도 한꺼번에 이 세 가지가 모두 종합된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도 서양보다 400년이나 앞서서 말이다. 11세기 北宋의 화가 郭熙가 쓴 <林泉高致>에는 그간의 산수화법을 종합한 삼원법이 상세히 서술되어 있고, 이것이 모두 실현된 첫 사례로 그 자신의 <조춘도>를 거론한다. 삼원법은 1. 정면에서 바라본 것 2, 아래에서 위를 바라본 것 3. 위에서 뒷면과 아래를 바라본 것 등 세 가지 이동 시점을 말하며, 이 세 가지 시점을 모두 한 화면에 구사하는 것이 핵심이다. 일견 조춘도의 화면구성은 서양의 입체파와도 유사해 보이지만, 하늘에서 땅을 바라보는 ‘심원’이 있다는 점, 그리고 서양으로 치면 <원근법-철도원근법-항공원근법>이 한 화면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훨씬 더 입체적이다. 이런 점에서 동양회화의 <삼원법> 이야말로 서양의 어떤 시각체계보다도 대상을 철두철미하게 해체했다가 다시 편집광적으로 재조립하는 과정이며, 마치 주인이 노예를 다루듯, 대상의 몸과 정신 모두를 철저하게 장악해 나가는 방법이다. 사랑방에 누워서 산수화를 따라 천천히 감상하는 선비의 시선은 자연에 대한 가학적 즐거움으로 가득했으리라. 그의 방 한 켠에 놓인 분재는 또 어떤가. 인간의 미적 만족을 위해 뿌리째 옮겨져 왔고, 발육이 억제 당했고, 보기 좋게 성형되었다. 서재를 나와 밖의 정원을 둘러보자. 쇠스랑을 들고 모래밭에 천천히 골짜기를 만든다. 우주는 그렇게 그의 손끝에서 무수히 파괴되고 창조된다. 그는 매일 아침 창조와 파괴를 동시에 수행하는 조물주가 된다.
이보다 어떻게 더 인간 중심적일 수 있는가? 이보다 더 어떻게 대상을 억압할 수 있는가? 삼원법의 시선은 전지전능한 지배자의 시선이고 그것을 3차원 현실공간과 삶 속에 구현한 것이 분재이고 일본식 정원이다. 풍수지리는 또 어떤가. 자연을 통해 인간의 부귀영화를 극대화하려는 지극히 이기적인 욕망이다. 삼원법은 이제 자연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판옵티콘이며 CCTV의 초거시경적 시각이 되었다.
그것을 자연친화적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착취자의 위선이자 자기 위안일 때에만 가능하다. 이 전시의 목표는 자연친화적이라고 믿어왔던 동양의 자연관이 사실은 인간의 구미에 맞게 자연을 다층적으로 편집하고 억압해온 것이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동양과 서양, 자연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라는 오래된 이분법적 편견과 맹신을 뒤집고, 오히려 동양의 자연관이 어쩌면 서양의 그것보다 더 심각하고 오랫동안 자연과 인간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방법들을 발전시켜 왔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전시는 이응노 선생을 중심으로 4명의 한국작가와 4명의 중국작가로 구성되었다. 이응노 선생은 알다시피 군부독재시절 가장 심하게 감시와 처벌을 받은 작가 중 한 분이다. 다양한 재료와 형식을 넘나든 그 분의 작업은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과 항의의 몸짓들이었고, 역설적이게도 수난을 통해 현대 수묵화의 새로운 활로를 열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이응노 선생에 대한 미술사적 평가가 다양하게 재조명되기를 바란다. 장재록은 삼원법이 고전역학의 가시적 세계에서만 작동하는 원리이며, 양자역학의 비가시적 세계에서는 무용지물이 됨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그는 비가시적 영역에서 삼원법이 제거된 디지털 산수화론의 성립 가능성을 타진한다. 장위는 산수화가 가진 정신적인 맥락을 먹과 인주라는 기본적인 재료적 물성으로 환원시키고, 붉은 인주를 손가락으로 찍는 반복적이고 촉각적인 행위를 강조한다. 마치 그는 성상파괴자처럼 전통 산수화론 속에 과대 포장된 숭고한 가치들을 하나씩 하나씩 해체하고 있다. 오윤석은 동양의 자연관을 상징하는 핵심 중의 하나인 풍수지리가 실은 무병장수나 부귀영화를 갈망하는 인간의 자기 욕망일 뿐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그가 그린 산수화는 칼자국으로 뒤덮여 있거나 온갖 상처들로 가득 차 있다. 이이남의 작업은 관조나 와유가 아닌, 전쟁터로 변한 산수화를 보여준다. 헬기와 탱크가 굉음을 내며 산수 속을 질주한다. 그의 작업은 전통산수화와 기계문명, 국제정치가 만들어낸 이 시대의 세기말적 산수화이다. 션샤오민의 분재 작업은 이번 전시주제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인간의 미적 만족을 위해 성형되고 변형된 동양의 자연관을 가장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그에게 있어 동양의 미학은 철저하게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쾌락에 근거한 것이다. 한편 김지평은 자연-인간-종교라는 문명의 조합을 여성의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있다. 불교나 수묵정신으로부터 소외되고 배제된 여성성을 통해, 부처님이나 공자 같은 성인마저도 자연과 인간을 지속적으로 불공평하게 억압해 왔음을 보여준다. 펑멍보는 교육용 연환화 형식을 빌어 문화혁명기에 국가이데올로기의 주입 도구가 된 홍색회화를 비판하고 있다. 산수화의 주류적 형식이 지배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인간을 개조하는데 일조하고 있음을 자신의 유년시절 일기를 통해 보여준다. 쉬빙은 끊임없이 중국 문명을 비판하고 해체해온 대표적인 작가 중 한 명이다. 산수화의 아름다움이 사실은 쓰레기로 만들어진 환영에 불과하고, 전통적인 삼원법이 감시와 처벌의 가장 현대적인 도구인 CCTV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동아시아의 산수화 전통에 대한 이러한 비판과 해체가 과격해 보일수도 있고, 장점을 감추고 단점만 들추어내는 또 다른 편협한 시선일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접근 방법만이 옳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동양화만이 가진 재료적 특성이나 자연관, 氣韻生動 이라든지 捨形取象이라는 미학, 頓悟나 漸修라는 방법론 등은 공존해온 다른 문명들과 충분한 변별력을 가지고 있으며 독자적인 가치 또한 있다. 다만 문제는 한쪽으로 편향되고, 심하게 모순적이며, 상투적인 옥시덴탈리즘과 오리엔탈리즘의 도그마에 갇혀서 천 년이 넘는 세월을 고인 우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지난 수십 년간 끊임없이 새로운 동양화를 외치고 새로운 수묵정신을 주창했지만 어느 것 하나 문제의 본질에 다가서지 못하고, 과거에 묶여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돌았다. 너무 무기력하고 답답했다. 이는 한국 동양화단 만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체가 같은 상황이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현대미술은 전통을 혁신해서 새롭게 미래로 나아가지 못했고, 시대에 걸맞는 독자적인 미술담론을 생산하지도 못했으며, 언제나 서양의 미학과 제도를 수입해서 써왔다. 어떤 때에는 파문당할 것을 각오하고 과거의 성인과 맞서는 용기도 필요하고, 비판으로도 부족하면 천년 전통과의 단절도 불사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臥遊하듯 방안에 누워서 산수를 음미할 것이 아니라, 일어나서 대문을 박차고 나가는 것이다. 그럴 때만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나는 지금이 바로 그렇게 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 전시가 동아시아 현대미술의 다양한 활로 중의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다소 과격하고 자극적인 주제와 제목을 붙였다.
이번 전시는 한국의 이응노 미술관에서 시작해서, 내년과 내후년에는 중국 유수의 미술관에서 2-3회 더 진행될 예정이다. 세 번의 전시를 거치는 동안 더 많은 나라의 학자와 작가들이 참여하게 되며, 다양한 담론과 작품들로 넓고 깊어질 것이다. 기획이 마무리되는 3년 후에는 이러한 성과들을 묶어 단행본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동양회화를 연구하고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 전시가 동양화의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들로 가득차서 화단의 풍성한 결실로 이어지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