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취저신(近取諸身)의 현대적 변용>

-장재록의 블랙 잉크 페인팅


이진명, 큐레이터



현재에 대한 시대적 징후를 가리키곤 할 때마다 흔히들 ‘후기 자본주의’라 하며, 이는 분열하는 양상이 극에 달한 자본주의의 정황처럼 들린다. 국가 경제의 경계가 허물어진 글로벌리즘, 노사 갈등, 양극화 심화, 환경의 파괴, 개인주의로 비롯된 이기심의 심화 등이 현재 자본주의가 보여준 정황들이다. 이러한 암울한 현재의 원인은 1981년 ‘주주의 가치(shareholder’s value)’라는 제목으로 천재 사업가이자 제너럴 모터스(GE)의 최고 경영자인 잭 웰치(Jack Welch)가 연설을 벌인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여하간에 경영인이 주주, 노동자, 부대 산업 인력 전반의 가치를 알맞게 고려하는 인본주의를 겸비하리라는 기대를 한 적이 없었지만, 이 천재 사업가의 사업 방침은 미국 자본계의 시대정신(zeitgeist)이 되었고 그 후 그 유명한 신자유주의는 유럽은 물론 남미로 아시아로 널리 퍼져갔다.


‘인본주의적 고려’ 없는 ‘주주의 가치’는 모든 불온함의 시작이다. 주주의 가치만을 고려하는 경영 방침은 기업의 자본금을 투자한 주주들에게 더욱 많은 이익과 수혜가 되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 임금은 줄어들고 노동자의 복리후생은 더욱 요원해진다. 산업 연구비는 줄어들 터이니 당장 주주들은 이익을 보게 되겠지만 과학기술자의 대접은 나날이 낙후해진다. 간접자본에 대한 투자가 소홀해지니 미래를 책임질 기술력의 진보에 제동이 생긴다. 따라서 중소기업 등 협력업체 또한 희망이 없게 된다. 결국,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중산층은 나날이 허약해지고 노동계급은 비관에 휩싸이는 가운데, 최상위층 계급만이 유일하게 늘어나는 그들의 자산가치를 은행권에 재투자하여 더욱 부의 편차는 심화되는 것이다. 부란 결코 위에서부터 아래로 기름 짜듯이 똑똑 떨어지지 않는다. 중간에서 누군가 집행해야 한다. 칼 마르크스는 주식회사야말로 사회주의로 진입하기 위한 바로 전 단계라고 피력한 적이 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를 지경의 현재를 바라보며 아연실색할 뿐이다.


장재록의 지대한 관심은 미(美, beauty)가, 즉 아름다움이 편재(遍在)하는가 아니면 편재(偏在)하는가의 문제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이 시대의 양극화나 불균형의 시점에서 보아 분명히 장재록은 아름다움의 편재(偏在)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는 듯이 보인다. 뉴욕의 브로드웨이나 타임 스퀘어 등지의 호화로운 중심지, 벤틀리, 메르세데스, 람보르기니와 같은 명차는 자본의 집적과 집중화, 편중화가 아니면 불가능한 아름다움이다. 역시나 세계는 불균형, 즉 에너지나 기운(氣運)의 태과(太過)와 불급(不及)의 변증체계다. 그리고 어김없이 중심(center)과 주변(margin)으로 이분되는 차별의 이원적 세계다. 장재록의 페인팅은 중심에 서구의 명차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장재록의 페인팅을 단순히 서구 명차 디자인이 지닌 유려한 곡선의 표면적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로 오인하지 말자. 그는 분명히 동양의 먹이 지닌 축적된 메타포의 역사에 대해 이해한다. 먹이란 아름다움, 정신을 표현하거나 표기하기 위해 생긴 중국 후한말 이전까지 거슬러 오르는 긴 역사를 갖추고 있다. 아름다움이나 문사의 생각을 표현 정리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식물 재료들이 타서 재가 되어야 하며 으깨져 기름이 되어야 한다. 장재록은 우선적으로 먹이 지닌 ‘희생’의 메타포를 즐겨 생각한다. 예를 들면 중세 수도사들의 하얀 손 위에 들려진 와인 한잔을 위해 무수한 나무등걸 같은 촌부의 손등이 필요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한 여인의 백옥 피부가 지니는 태과(太過)의 미적 속성을 위해 필요한 불급(不及)의, 혹은 결핍의 수많은 거친 여염집 농부의 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엔트로피의 상호작용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다만 우리는 이 이치를 너무나 쉽게 망각한다. 이 망각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장재록의 페인팅이 지니는 표면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자. 즉 위풍당당한 서구의 명차를 바라보면서 어떠한 느낌이 드는가? “역시 축적된 자본이야말로 아름다움의 속성마저도 좌우해버리는 중차대한 역량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세계와 화합할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일 것이다.


헤겔은 ‘인간정신은 발전만을 계속한다’고 했지만 이는 언어도단이거니와 나는 이를 믿지도 않는다. 반대로 주희는 송나라 때 세계의 운행, 즉 도(道)를 가리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고 말했다. 한번은 음이 성하고 쇠퇴 통일하면서 양이 뻗쳐 다시 양이 생장성쇠하며 무수히 반복하는 순환의 원리를 말한다. 이를 “일월(日月)의 진퇴(進退)”라고도 하며 “음양(陰陽)의 굴신(屈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음은 물질문명이며 양은 정신문명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문명을 두 개의 조류로 본다면 정신문명이 발달할 때에는 물질문명이 쇠퇴했고 반대로 물질문명이 발전했을 때 정신문명은 쇠퇴했다. 현재의 문명은 물질만이 극도로 발전한 문명이지 정신은 극도로 쇠퇴했음을 직감할 것이다. 이 물질의 분열이 극을 달하다 쇠퇴할 때 나는 칼 마르크스의 예언이 이루어질 것만 같다.


장재록은 이번 작품세계, 즉 물질의 중심성에 극도의 하이라이트를 맞추었다. “이 시대를 읽고 싶어서였다”고 내게 누차 말했다. 공자가 예전에 ‘근취저신(近取諸身)’의 태도를 강조했는데, 이 말은 자기의 가까운 몸에서 멀리 저 우주를 파악한다는 뜻이다. 장재록은 자기 가까운 사람들이 지닌 욕망의 끝, 그 욕망의 물질적 구현체를 바라보면서 “사는 게 재미없어 보이네”라고 말하곤 했다. 아름다움이란 분명히 편재(偏在)하는 것이 아니라 편재(遍在)한다. 깨달음이나 마음의 울림에는 세속의 가격이나 신분지위가 기생할 수 없다. 그것들은 물질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루 존재하는 아름다움은 정신적 아름다움이다.


장재록이 먹으로 근취저신해서 그려낸 화면에는 서구 중심의 세계운행, 그 눈부심에 드리워진 죽음, 불균형, 희생, 화합의 불가능성이 내포되어있다. 이 암울한 풍경을 극복하는 길은 평화(平和)라는 단어의 속뜻을 명찰하는 길밖에 없다. 평화(平和)란 쌀(禾)을 저울에 재어(平) 나누어 먹는(口) 일인 바 따뜻하고 소박한 마음가짐밖에 없을 것이다. 장재록은 현재 균질적인 전면적 회화를 다루며 이후에 심화시킬 프로젝트를 세우고 있다. 사람들, 즉 군중의 모습이 그것이다. 군중은 또 얼마나 복잡한 의미를 지니는가?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면서도 군중 속에서 외롭다. 그러면서도 군중 속에서 혁명의 힘이 생성되고 또 다시 군중은 외로움의 늪으로 변신한다. 물질문명의 불온한 아름다움과 군중의 외로움, 그것이 현재의 정오의 태양이며 우리는 이 눈부심 때문에 제대로 눈앞의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장재록 화가의 눈은 이 눈부심에 초연해지길 바라는 바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화가, 즉 예술가는 음과 양, 두 개의 조류의 교차를 모두 파악하는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개의 교차를 파악할 수 있는 경지를 위해서라도 장재록 화가가 긴 시간의 미래를 내다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