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풍경의 풍경>


박순영, 서울시립미술관



예술은 일반적으로 현실을 충실히 묘사하는 구상미술과 관념의 세계를 지향하는 추상미술로 나뉘어진다. 그러나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 외에 무엇이 사실인지를 고민하고, 그 사실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근거를 같이 한다. 말하자면, 구상미술이 현실을 어떻게 재현하는가에 관심을 갖는다면, 추상미술은 현실을 부정하고 어떤 것이 진짜인가에 관심을 갖는다. 따라서 예술의 문제는 사실성을 문제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서양에서는 모더니즘 미술이 시작되기 이전까지 구상의 관심이 주를 이루었다. 관념론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서양사상의 조류를 본다면 서양의 미술이 온통 재현에 집중해왔다는 점은 재미있는 일이다. 물론, 정신의 측면에서 볼 때 예술이 물질을 다룬다는 점으로 인해 낮은 단계로 여겨져서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말이다. 서양은 근대에 접어들면서 사실성에 대한 문제가 크게 부각된다. 진짜 실제하는 것을 현실에서 찾는 사실주의 화가들이 등장하고, 나아가 형식이나 정신 자체를 표현하는 추상미술이 생겨난다. 하지만 사실주의와 달리 추상의 근거는 실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실에 대한 부정을 예술을 통해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주의는 객관적인 현실을 형상을 통해 드러낼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고, 어떠한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 정당한가에 따라서 분화가 이루어졌다. 여하튼, 추상과 구상의 문제는 둘의 첨예한 대립을 통해 사실성에 대한 다양한 담론의 장을 열었다.


동양은 실경산수가 나타나기 전까지 줄곧 관념에 의한 예술을 추구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서양의 관점에서 비롯한 것이고, 실제 추상과 구상의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서양에서 감각의 산물로만 치부되던 색을 사용하든 사용치 않든 형상의 본질을 추구하든 사생을 하든 생생함에 온통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성의 문제는 현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생생함의 기운에 있는 것이었다. 그림의 재료를 보더라도 서양에서 검은색으로만 여길 법한 묵(墨)에서도 색을 찾았고, 윤기를 강조하면서 생의(生意)를 중요시하였다. 따라서 서양의 사실성의 문제는 추상과 구상의 구분에서 시작된 것과 별개로 동양에서는 진즉 있어왔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현대미술의 흐름을 보면, 짧은 시기 동안 서양과 그 괘를 같이 한다. 19세기 말, 묘사위주의 양화를 받아들이고, 50년대 말, 서양 추상을 수용하면서 단색조 회화를 구축하고, 70년대 말, 극사실화를 일군다. 이를 서양의 관점에서 보면 추상과 구상으로 구분할 수 있겠지만, 동양의 관점과 사실성의 문제에서 보면 그러한 문제는 아니다. 한국에 짧은 시간 동안 나타난 주류의 변화는 급변하는 시대에 따른 새로운 표현의 갈망과 이전세대에 대한 부정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극사실을 비롯하여 사실주의를 추구하는 회화는 현대에 논의되는 사실주의에 대한 평가, 즉 사실주의를 하나의 양식이라기보다 작가의 현실인식의 태도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사실주의란 단순히 누구나 알고 있는 가시적 현실의 재현이나 모방이 아니라, 작가가 주관적이고 개별적으로 인식한 현실에서의 사실성을 구체적인 형상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다. 장재록 작가가 먹으로 그린 생생한 도시풍경은 이러한 사실주의의 사실성에 견주어서 볼 때 큰 의미를 지닌다.


장재록은 이번 전시를 위해 2009년 뉴욕으로 떠났고, 그 곳에서 자신의 시각을 끌어당기는 이미지를 찾았다. 화려한 뉴욕의 밤거리, 갓길, 주차장 등에 세워져 있는 스포츠카 그리고, 사람. 현대 도시를 즉각적으로 알아채게 하는 모든 대상들은 온통 검은 먹인데도 그 화려함과 윤기가 전혀 손실되지 않았다. 색이 없이도 색이 있고 광이 없어도 반짝인다. 묵(墨)의 운용이 적합하게 이루어진 탓이다. 먹의 농담들이 강한 대조를 이루면서도 그러진 형상을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 도시네온에 대비되는 밤하늘의 검은 적막도 그 깊이를 잃지 않고, 빛의 번뜩임에 대비되는 차체의 검은 철판도 그 두께를 잃지 않았다. 그렇게 저녁이 번져 밤이 되고, 빛이 번져 드센 스포츠카가 된다. 농담의 강한 대비 사이에 깃든 번짐이 작가의 붓을 통해 딱 필요한 만큼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번짐, 장재록의 그림에는 번짐이 있어 도시의 세련미가 서정성과 함께 드러난다. 그래서 도시야경의 파편화된 모든 요소들이 하나의 광활한 풍경으로 조화를 이루고, 차체에 비추인 가로수의 잔가지들이 차체에 스며들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제 그가 구체적인 형상인 뉴욕과 스포츠카를 통해 드러내고자 한 자신의 주관적이고 개별적으로 인식한 현실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고충환 미술평론가는 장재록의 그림에 대해 “자동차나 도시가 자본주의 시대의 전형적인 아이콘인 만큼, 이로부터 작가의 그림은 현대적이고 동시대적인 리얼리티를 얻는다”고 말한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작가의 그림을 보면서 현재의 모습을 즉각적으로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특정 장소로서의 뉴욕이나 특정 자동차로서의 이름을 떠올리게 된다. 아이콘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감수해야 할 바이다. 하지만 그는 현대의 아이콘을 과감하게 선택하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현재 처해있는 지금이라는 시간성을 얻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선택한 매혹적인 차에서 그 표면에 비추인 자연의 모습을 표현하는 데에 신중을 기했고, 자연이미지와 도시의 아이콘인 자동차의 병합이미지를 만들어 내었다. 이미지를 표현하는 프로세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디지털이미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강한 대비를 그림에 고스란히 끌어들인다. 이에 고충환선생은 아날로그적 프로세스와 디지털적 프로세스의 접점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그의 그림에 대해 “현대인의 자기정체성을 대변해 줄 강력한 메타포”로서 자동차를 그리고 있다고 말한다. 현대인은 정치적 이데올로기, 종교, 국가,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많은 자유를 보장받고 있다. 그만큼 누릴 것도 많아지고, 선택의 폭도 다양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자율성은 하락했다. 자기자신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자기원인의 의미를 잊어버렸다. 자기 밖의 것에 의존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규정한다. 그래서 이러한 현대인의 자기정체성은 물질에 의존하는 욕구를 통해 드러나게 되었다. 작가가 수묵을 운용해서 드러낸 도시의 은유들은 그 화려함과 강력함을 유지한 채로 이면으로 흘러내리는 쓸쓸한 그림자까지 포괄하고 있다. 뉴욕 밤거리에 스며있는 사람들의 그림자, 전광판에 그려진 선정적인 연인의 도식적인 포즈와 맹한 마돈나의 눈짓은 작가가 주관적으로 개입한 현실에 대한 인식으로 보인다.


욕망으로 점철된 현대의 모습과 소외된 인간 군상들, 그리고 이를 숙연히 바라보는 하나의 증인. 하지만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먹을 통해 예술에 있어서 필연적인 물질의 의미를 덧붙인다. 먹의 재료적인 특성, 즉 나무의 몸을 태워 만들어진 먹은 생의 깊이를 지닌 흑(黑)을 발산한다. 그는 이렇게 욕망으로 이루어진 현대 도시의 현상을 생의 깊이를 지닌 수묵을 통해 어떤 화해를 바라고 있다. 인간은 물질에 의존하려는 욕망과 함께 삶의 숭고한 욕망도 함께 갖고 있다. 이것이 그가 오로지 수묵을 통해 자신이 바라보는 현실을 그리는 이유이다. 여기서 그의 그림이 뿜어내는 삶의 사실성을 더욱 정확하게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