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문명인의 욕망과 패티쉬>

 

고충환, 미술평론

 

 

현대인의 존재를 결정하거나 최소한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이데올로기(혹은 에피스테메?)는 단연 자본주의일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꿰뚫는 전형적 아이콘으로는 자동차를 들 수 있다. 자동차는 단순한 운송수단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동차는 이제 사람과 함께 자본주의의 욕망을 실어 나르는 욕망의 아이콘이 되었다. 욕망의 아이콘과 관련하여 자동차는 주로 남성주체의 욕망을 반영하며, 이는 모피가 여성주체의 욕망을 반영하는 것과 비교된다(작가는 자동차 이전에 이런 자본주의 시대의 욕망의 아이콘으로서 샹들리에와 각종 장신구를 소재로 차용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자동차가 그 욕망과 함께 실어 나르는 사람들은 자연인보다는 도시인인 경우가 많다. 자동차는 말하자면 자본주의 시대의 현대인, 도시인의 자기 정체성(그 자체 욕망과 긴밀하게 연동된) 형성과 관련이 깊다. 이와 관련해 볼 때, 현대에도 자연인이 있을까 싶다. 거칠게 말해 현대인은 모두가 도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의 몸은 비록 전원생활에 속해져 있을 때조차 그의 손에 어김없이 들려져있는 핸드폰이나, 바깥세상과 소통하게 해주는 인터넷은, 그를, 적어도 그의 의식을 사실상의 도시인으로 보게끔 한다.


장재록은 이렇듯 자동차를 그리고, 그 배경화면으로서의 도시의 정경을 그린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 시대의 이데올로기(가치관)에 반응하고, 그 이데올로기가 작동되는 방식인 욕망(페티시즘)의 메커니즘을 반영한다. 자동차나 도시가 자본주의 시대의 전형적인 아이콘인 만큼, 이로부터 작가의 그림은 현대적이고 동시대적인 리얼리티를 얻는다.

 

이렇듯 장재록의 그림은 자동차를 소재로 한 것이란 점에서 일종의 사물 초상화로 범주화할 만하다. 사물 초상화란 개념은 자본주의 이후, 소비가 미덕으로 여겨지는 시대 인식과 함께 나타난 달라진 사물관념, 이를테면 페티시즘, 물신, 물화 현상과 관련이 깊다. 그리고 페티시즘은 기왕에 물질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비물질적인 것, 비가시적인 것, 정신적인 것마저 마치 물질인 양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로 나타난다. 작가의 그림에서 자동차는 말하자면 자동차 자체로서 뿐만 아니라, 자동차에 투사된 자본주의의 욕망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벤츠는 부의 상징으로, 지프차는 남성성의 상징으로, 그리고 스포츠카의 유려한 체형은 여성성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작가의 그림이 이렇듯 (사물) 초상화의 형식을 띠고 있는 만큼 초상화의 전형적 문법이랄 수 있는 소위 정면성의 법칙 역시 확인된다. 여기서 정면성의 법칙이란 말 그대로 정면의 고정된 시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물의 형태가, 사물의 사물다움이, 가능하다면 사물의 본질이 두드러져 보이고 돋보이는 최적의 시점을 붙잡아낸 시지각 방식을 말한다. 정면성의 법칙이 이렇듯 사물의 본질이 두드러져 보이는 최적의 시점을 찾아내는 것인 만큼 그 과정에 연출이 개입되고, 따라서 현실 자체라기보다는, 엄밀하게는 연출된 현실, 극화된 현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현실인식 혹은 리얼리티와 관련하여 독특한 지점을 시사해준다.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비록 자동차와 그 배경으로서의 도시 이미지를 현실로부터 차용한 것이란 점에서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이와 동시에 그 이미지는 사실은 최적의 이미지로 각색되고 연출된 것이란 점에서 현실을, 그리고 현실인식을 비켜간다. 과장되게 말하자면 작가의 그림은 현실인식보다는 일종의 이상주의에 의해 견인되고 있는 것으로까지 볼 수도 있다. 상품의 가치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려는 것이 자본주의의 욕망이며 이상이라고 한다면, 현실에 대한 작가의 태도(이를테면 연출로 나타난)는 그 이상을 실현하는 일(현실을 상품화하는 일)에 복무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로써 작가의 자동차 그림은 각각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를 날실과 씨실 삼아 하나로 직조해낸 것이며, 그 상호관계적이고 상호간섭적인 경계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 특유의 긴장감을 자아낸다.


그런가하면, 이렇듯 각색되고 연출된 현실은 또 있다. 자동차의 차체에 반영된 풍경인데, 주로 나무와 하늘 등의 자연 이미지들이다. 도시라고해서 이런 자연 이미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이를테면 가로수와 같은)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자동차와 자연 이미지와의 결합 내지는 조화는 사실은 합성된 것이다. 자연 이미지를 가장한 가공의 이미지이며, 현실을 가장한 비현실적 이미지인 것이다. 그럼에도 작가의 그림에선 이런 인위적인 개입과 가공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려운데, 이렇듯 영락없는 현실 속에다 가공을 심어놓는 작가의 감각이나 재능의 소산으로 보인다. 나아가 작가는 이렇게 합성된 이미지를 통해서나마 현대인들의 자연(아마도 현대인이 사실상 상실한 것으로 봐야할 어떤 원형적 존재와도 통하는)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로써 작가의 그림은 가급적 현실 그대로를 충실하게 모사하는 것에 연유한 재현적인 완성도가 주는 감각적 쾌감이 강점이다. 현실에서 진즉에 알고 있던 것을 그림 속에서 재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외형적인 감각적 닮은꼴을 제외하면, 작가의 그림은 결코 현실 그대로를 복제한 것은 아니다. 비록 최종적으로 나타난 그림은 전통적인(혹은 전형적인) 먹그림이지만, 정작 그림이 제작되는 과정을 추적하거나 재구성해보면 현저하게 매체(미디어) 친화적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런 미디어의 간섭으로 인해 현실은 재해석되고 극화된다.


이를테면 작가는 거리에서 자동차를 사진으로 찍고, 그 사진을 포토샵을 이용해 변형하는데, 그 과정에서 최적의 상태가 유지되도록 이미지를 조작하고 연출한다. 그리고 이렇게 입력된 이미지 정보를 컴퓨터를 통해 확대 출력하는데, 알다시피 컴퓨터상에서 이미지를 확대하면 상은 자잘한 픽셀들의 조합 내지는 집합으로써 나타난다. 이렇게 픽셀의 단위구조가 두드러져 보이는 이미지 그대로 화면에 옮겨 그린 후, 그 픽셀 하나하나를 먹으로 메워나가는 과정을 거쳐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작가는 픽셀의 단위구조를 보다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으며, 그 이면에서는 디지털매체 시대의 이미지의 존재방식(각각 인쇄매체 시대에 망점으로, 전자매체 시대에 광점으로, 그리고 디지털매체 시대에 픽셀의 단위구조로 나타난)에 대한 남다른 이해와 인식이 엿보인다. 결국 실제 그대로를 빼닮은 작가의 자동차 그림은 실제로는 픽셀의 단위구조가 집합된 것이며, 그 이면에는 사진과 포토샵, 컴퓨터와 디지털 프로세스와 같은 각종 미디어와의 연계성이 보다 적극적인 동인으로써 작용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작가의 그림이 현대성을 얻는 것은 단순히 자동차라고 하는 현대적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만 연유한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 말하자면 단순히 소재주의에 머물러 있지는 않다는 것이며, 소재와 더불어 이를 표현하는 방법론 역시 현대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최종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그림 자체는 어디까지나 먹그림이며, 철저한 수작업의 공정을 거쳐 완성되는 것이다. 이로써 작가의 그림은 한국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아날로그적 프로세스와 디지털적 프로세스가 하나로 만나지는 접점 가능성에 대한 계기를 예시해주고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설핏 자동차를 소재로 한 일관된 그림으로 보이는 장재록의 그림은, 그러나 사실은 자동차 자체에 주목한 그림과, 자동차의 차제에 반영된 풍경에 포커스를 맞춘 그림, 그리고 자동차가 놓여진 배경화면으로서의 도시의 정경을 포착해 그린 그림으로 세분화된다. 전자의 두 경우가 자동차를 근경으로 잡아낸 경우라면, 후자는 원경의 확장시점을 취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자동차의 차체에 반영된 풍경이나, 자동차와 함께 도시의 정경을 끌어들인 그림에서 작가의 관심은 자동차 자체에 대한 관심(이를테면 사물성으로 나타난)으로부터 나아가 일종의 관계의 미학(이를테면 문명과 자연과의 관계나, 문명과 일상과의 관계로 나타난)으로까지 연장된다. 이처럼 자동차로부터 그 배경으로, 사물성으로부터 관계성으로 확장되는 관심은 작가가 단순히 자동차 자체만을 겨냥하고 있지는 않음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자동차 자체의 즉물성과 함께, 무엇보다도 자동차를 현대인의 자기 정체성을 대변해줄 강력한 메타포로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의 시작은 단순한 자동차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촉발된 것일지도 모르나, 적어도 그 이후 과정은 이렇듯 관계의 미학에 대한 관심이나, 현대적이고 문명적인 메타포로까지 확대 재생산되고 있으며, 그 경향은 차후로도 더 확장되고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